2023년도 다산책방에서 편집한 토지 판에서는 고 박경리 작가님의 서문이 총 4개가 수록되어 있는데
2023년판 서문에 포함된 「토지를 쓰던 세월」 1994 겨울호, 《문학과사회》.
2002년판 서문에는 「2002년판 『토지』를 내며」, 2001년.
1994년도 출판과 함께 「서문」, 1993년.
토지 1부를 쓰고 작성된 작가의 말 「자서自序」, 1973년.
이 그것이다.
초~중학교 시절 뭣도 모르고 읽었던 토지가
그때는 그냥 아주 분량이 많은 책이기에, 책벌레라는 사실에 나름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어린 나는
으스대기 좋은 유세거리 쯤으로 생각하고 읽었던 책이긴 했었으나
결국 그 기억들이 아주 오랜 기간 나에게 남아 있었으며,
내가 전혀 인식하지도 못했고, 토지와 그 존재에 대한 대부분을 다 까먹은 이후에도
내 무의식의 어떤 깊은 곳에 자리잡은 채로 내가 가진 근원적(씹덕적)취향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더욱이 나는 씹덕 근원 찾기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어른이 된 뒤 다시 토지를 들었지만,
이 서문들을 읽으며 나는 필연적으로 여기 다시 이끌릴 운명이었음을 느꼈다.
그럼 이제, 서문의 대체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날뛰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포스트 #가보자고
감상은 서문이 작성된 시점의 내림차순으로 간다.
「2002년판 토지를 내며, 2001」
서문 쓰는 것이 두렵다. 할 말을 줄이고 또 줄여야 하는 인내심에는 억압적 속성이 있으며, 부정적 성향에다 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늘 현실도피를 꿈꾸고 있기 때문인데 내게는 어떤 것도 합리화할 용기가 없다.
서문의 가장 첫 문장이다.
정확히 이런 기분 때문에 저렇게 쓰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나 어딘가 글을 써놓고 있다보면, 참 말하고 싶은게 많으면서도 이야기를 계속할수록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을 느끼곤 할 것이다.
결국 할 말을 줄이는 행위에선 스스로의 자유을 억압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음은 당연한 것이고...
나는 이런 대작을 쓴 작가마저 그러한 슬픔을 느낀다는 점에서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모두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데도,
이건 내 개인적 경험인데,
나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에 도달하지 못하면서도 나의 것을 사랑하고 말았을때
나는 가끔 나 자신을 변명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스스로 만든 세상에 몰입하고 행복해 했으면서 문득 고개를 들어 타인을 발견할 때, 그러한 모순을 느낀다.
내가 작가님에게 공감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주제 넘겠지만, 적어도 나는 저 문장에서 나의 복잡한 감정을 표현할 단어는 찾은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동안 나는 『토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중략)
심지어 <토지문화관>에 관해서도 소설과는 무관하며 '토지공사'에서 지었으니 토지라, 신경질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대작가께서 하시는 회피치고는 다소 귀여운 느낌이 들어 가져왔다.
스스로 만든 작품에서 도망치고 싶은 감각이란 ... 아마 뒤에 나오는 내용 때문인 듯한데
그해, 그러니까 『토지』를 끝낸 1994년 8월 15일, 그때도 나는 해방감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멍청히 앉아있었다.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고 막막했던 길 위에서, 폭풍이 몰고 간 세월이 끔찍하여 그랬을까.
이것 또한 내 개인적인 경험일 뿐이지만,
무엇이든 하나를 완성해가는 과정에는 필연적인 상실감이 존재한다.
프로그램이든 만화든, 내가 내 온 힘을 다 해 그것들을 만들어 나갈때,
뭐든지 시작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였더라도, 그 과정은 항상 지루하고 힘겹다.
하지만 꼭 완성만 하고나면 축제일 것이라 기대하며 끈질기게 작업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럼 막상 정말 그러한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늘, 예상을 배신하는 법이 없게...
나에게서 떨어져 나온 그것은 분명 내가 낳았(?)지만 신기하게도 너무 낯설고
내 일부분이 나에게서 떠나간 감각때문에 오히려 며칠이나 되는 우울감으로 마라탕 돈가스를 과식하게 만든다.
심지어 내가 고작 이것을 만들고자 내 많은 것을 희생했는가 하며 일명 '현타'가 온다.
진짜임
어쩌면 작가님도 그런 기분을 느끼신게 아닐까.
아무리 토지를 썼기로서니.
근데 하필 광복절에 끝내신건... 한국 최고의 작가, 진심 INTJ 같음
머라카노 / 저는 토박이 경상도 사람이고 정식 사투리입니다
그러나 구세대에 속하고 편협한 나로서는 문학작품이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생산되고 소비되는 오늘의 추세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인과 작가의 차이는 무엇이며 기술자와 작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차이가 없다면 결국 문학은 죽어갈 수 밖에 없다. 의미를 상실한 문학, 맹목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삶,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INTJ 같다고 한 이유,
구세대에 속하고 편협하다고 자신을 표현하고 있지만,
결국 자신의 길이 옳은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시며 일편 꾸짖으시는 저 자신감이 보이는가?
제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데요, '내 말이 맞음'은 진짜 특임
특히 '내가 좀 편협해서' 라고 시작하는 부분부터 레알 찐인듯.
아니 절대 작가님을 뭐라하고 싶은게 아니라 이것마저 너무 좋은거임.
물론 아니라고 하실수도 있지만 근데 그냥 전 그렇게 읽었어요 왜요?
난 이 작가님 굉장히 자신감 있고 동시에 자기애도 있으시고, 그러면서도 아주 연민이 많은 분이라고 느꼈음.
그래서 모순에 휩싸인다고 첫 문장에 적으신 것 같음.
굉장히 생각이 깊고 똑똑하신 분이고, 그래서 자기 자신의 그러한 모순까지 인지하셨기 때문에 영원히 슬프고 영원히 힘든데 영원히 할말 많아서 한편으론 꾸짖고 싶은 그런 분이 아닌가 싶음.
글쎄, 그리고 기술자와 작가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저는 기술자이자 작가로서
하나는 프로고 하나는 아마추어지만 아무튼
서문의 이 문장을 읽게 되었다는 것에 일단 굉장히 신이 났고
작가님이 제시한 어떤 양극단의 성격을 가진 것을 내가 동시에 보유 한다는 점이 제법 으쓱해져서 한마디 좀 해보자면
둘다 결국 사람 먹고 사는 일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한쪽은 배를 먹여살리고 한쪽은 마음을 먹여살리는 것 같군요
농담이고요
저도 모르겠어요 뭐가 다른 걸까요?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요?
이것만으로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기 때문에, 만약 고찰하게 된다면 별도의 포스트를 써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오랜 옛적부터 지리산은 사람들의 한과 슬픔을 함께 해 왔으며,
(중략)
하며 횡설수설하는데 별안간 목이 메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중략)
아아 이제야 알겠구나, 『토지』를 쓴 연유를 알겠구나 마음속으로 울부짖으며 나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작가님의 생애에 대해선 거의 알지도 못하고
내가 아는 사실은 경상도 출신이시며, 토지 작가님. 이것들 밖에 없지만
여기까지 읽으며 이 분에 대해 상상해 본 이미지는 참 무뚝뚝하고 냉소적으로 보이시면서도
참으로 많은 것에, 때로는 정말 저기까지? 싶은 것에 공감하고 눈물 흘릴것 같은 분인 것이다.
애시당초 그러한 마음이 없으면, 19세기 말의 배경부터 시작해 울적했던 한국의 역사 구석구석 많은 곳을 돌아보며 그 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존재를 도닥여 주고 있는 토지는 세상에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INTJ 맞음
...그만할까예?
다만 죄스러움이 가끔 마른침 삼키듯 마음 바닥에 떨어지곤 한다. 필시 관광용이 될 최참판댁 때문인데 또 하나, 지리산에 누를 끼친 것이나 아닐까. 지리산의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먹고살 만한 사람들에 의해 산은 신음하고 상처투성이다.
지금 보이세요?
어디 지리산뿐일까마는 산짐승들이 쉬어볼 만한 곳도 마땅치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식물, 떠나버린 생명들, 바위를 타고 흐르던 생명수는 썩어가고 있다 한다.
도시 인간들이 이룩한 것이 무엇일까? 백팔번뇌, 끝이 없구나. 세사 한 귀퉁이에 ... (후략)
보통의 생각으로는 소설 토지의 인기로 인해 관광객이 생긴다면 그저 좋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누를 끼친다' 하며 깊은 슬픔을 느끼시는 듯 하다.
앞서 상인과 작가는 무슨 차이냐 한탄 하시고, 자신의 모습에 모순을 느낀다 하신 것의 가장 큰 이유들이
이 연민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정말 큰 연민과 깊은 통찰을 가진 분임에 틀림없다.
근데 하필 안타까워 하고 있는게 지리산 및 자연이랑 산짐승인게 진짜 킥임.
INTJ 동물 안키우는데 동물 좋아함
아무튼, 지리산과 자연이 그 모습 그대로 있지 못하고, 최참판댁은 관광지가 되며
그만 자본과 상업이라는 때(부정적이시니)가 묻는 것에서 죄악감을 느껴 한탄한다 해버리시면...
굳이 당신이 그러실 것 까지야 있냐고 말하고 싶기도 하고, 슬픈 마음도 알겠고 아휴.
그렇다고 사람들이 지리산 등지를 성지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다녀오길 바라는 건 아무래도 우스운 얘기기도 하고,
토지가 차라리 잊혀지길 바라신다면 할말은 없지만 (사실 많음 토지 어케 잃어?)
그런 안쓰러운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계신건 이 분이기에 가능한 거겠죠.
여간 참 쓸쓸하고 마른 듯한, 단단한 어떤 표면에도 고통에 대한 인식과 눈물의 따듯함이 느껴지는 글이어서,
소설이라는 매체에 가려 막연히만 느껴졌던 작가님을 잠깐 엿볼 수 있었던 것 같아 좋은 서문이었습니다.
「토지를 쓰던 세월, 1994」
시간은 각일각 태어나고 죽어간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 삶에서의 광활한 느낌이며 한편 편의를 위한 구분인데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진다는 것은 끝없는 문답이 될 것이다.
작가님 혹시 현대 물리를 좀 하셨는지요.
시간이란 그 말대로 사실 없다고 합니다. 그냥 편의를 위한 구분이라지요.
근데 통찰하셨다고... 여기서 약간 섬뜩함
만류귀종 사이언스 인가봄
각일각 숨을 쉬고 살았다 일이라든가 온갖 사물과 만나고 부딪치며 생존을 위하여...
(중략)
그런 일조차 세월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신기루와도 같은 것으로 그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
잠시만, 진짜 심상치 않음.
그러나 의미와 가치가 그 어떤 것이든 활자로 가득 채워진 책의 부피로 남아 있는 것, 하나의 작품으로 남아 있는 것만은 우선 확실한 존재로 간주할 수 있고 가까스로 시간을 매달아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난 그만 여기서 무릎을 꿇고 만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러니까 이거예요.
오타쿠 여러분들은 모두 동인지를 내야합니다.
우리가 그때 가졌던 마음과 시간은 오로지 책으로만 겨우 매달아 둘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다시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적자면,
항상 그림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나는 나를 가르친 많은 미술 선생님들,
첫째는 일곱살 때 학교 앞 미술학원 선생님 (잘 계시는지요? 덕분에 사람이 되었습니다.)
둘째와 셋째로는 어른이 된 뒤 동네 문화센터 수채화 선생님, 홈플러스 문화센터 미술 선생님.
이렇게 세 분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는데
세 분 각기 다른 분들이고 뭐 공통점이란 걸 찾기 힘든 사람들이긴 했는데,
첫번째 선생님은 내가 엉망진창으로 그저 붓을 종이에 문대고 있으면,
예컨대 이 새우깡 봉투는 맛이 없어 보인다거나 등의 피드백을 주시곤 했다.
두번째 선생님은 내가 그려놓은 시든 식물을 보며,
루트는 이 식물이 싱싱했던 때에 대해 생각해 본적 있어? 라고 말씀하셨다.
세번째 선생님은 내 그림에 대해,
기술은 좋지만 전혀 감정이 없다하며 실망을 나타내시곤 했다.
그때는 전부 이해를 못했던 것이고 저런 피드백들은 내 마음 속에 아주 오랜 의문으로 남아 있었는데,
최근 열풍이 분 AI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서 이제서야 알겠다! 라는 느낌이 오는 것이다.
AI 그림은 다들 알겠지만, 기술적으로 그 그림들은 매우 잘? 그려진 그림이고 조금 손만 보면 그닥 거슬릴게 없다.
하지만 그런 그림들을 보는 것이 왜 그렇게 재미가 없는지에 생각해 보면
박경리 작가님이 말씀하신 대로 작가가 혼을 다해 가까스로 매달아 놓은 시간 따위, 거기엔 한톨도 없기 떄문일 것이다.
나는 사람 손으로 만들어진 많은 작품들이,
눈에 보이고 문자로 읽히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분명 담고 있지 않나. 라고 생각해 보게 되었다.
새우깡을 아무리 빨갛게 칠해도, 비닐 봉지를 아무리 반짝이게 묘사해도, 내가 새우깡을 좋아하지 않으면, 과자 봉지를 뜯을 때 나는 경쾌한 소음에서 기쁨을 느끼지 않으면 난 과자를 맛있게 그릴 수 없을 것이고
시들어 버린 식물을 아무리 노랗게 칠해봤자, 그 식물이 가졌던 건강했던 나날들에 대한 아쉬움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없으면 나는 영원히 시듦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며,
내가 애써 그려낸 오렌지와 복숭아에 비친 햇빛에 대한 포근함을 내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탐스러운 과일을 그려도 그 단맛은 절대 내 것이 될 수 없고 그 감탄을 작품에 매달 수 없다.
역시 화려한 AI 그림 따위보다 좋아하는 캐릭터를 사랑이 가득담긴 마음으로 그린 친구의 팬아트가
그토록 재밌고 예뻐 보이는 이유와 같은 것이다.
박경리 작가님은, 고군분투하며 토지에 자신의 그 수많은 시간들을 애써서 매달아 두셨고
결국 그런 것에서 우리가 감동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사실 자기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고독한 행위다. 묻는 사람은 부담스럽고 난처해 하기도 하지만 언어는 결코 완전한 것이 될 수가 없다. 듣는 사람은 진실을 파악할 수 없고 말하는 사람은 진실을 전달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와 같이 진실을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은 대개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것이다.
언어가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너무도 당연하지만 매우 까먹기 좋은 사실이다.
그렇다, 우리는 절대 서로가 가진 진실을 온전히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사과와 당신이 말하는 사과는 늘 같은 것일까?
언어는, 조금 컴퓨터하게 설명하자면 연속적이고 변화하는 이 아날로그 세상을
이산적으로-디지털-일반화하여 표현하는 아주 한계가 큰 도구인 것이다.
그 외로움을 당신은 벗어났다 하시는데, 2001년 서문에서 보기엔 못하신거 같습니다.
하소연 하기 싫고 구질 구질한 신세타령은 안하련다 하시는 이 분은
역시 INTJ
치열하게 살지 않는 목숨은 없다. 어떠한 미물의 목숨이라도 살아남는다는 것은 아프다. 끝없는 환란의 고개를 넘고 또 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어떠한 역경을 겪더라도 생명은 아름다운 것이며 삶만큼 진실한 것은 없다. 비극과 희극, 행과 불행, 죽음과 탄생, 만남과 이별, 아름다움과 추악한 것, 환희와 비애, 희망과 절망, 요행과 불운, 그러한 모든 모순을 수용하고 껴안으며 사는 삶은 아름답다. 그리고 삶 그 자체만큼 진실된 것도 없다. 문학은 그 모순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표현 아니겠는가.
좀 길지만 너무 마음에 드는 문장이라 전체 인용했습니다.
정말 연민 많은 분 2
그리고 정말 많은 것을 사랑하신 분.
이런 마음이 없으면 토지를 만들 수 없었겠구나. 이런 분이어서 토지를 쓰셨겠구나.
그렇습니다.
포스트 쓰면서 계속 눈물 실시간으로 흐르는 중.
「서문, 1993」
토지의 출판은 중단 상태로 들어갔다. 문학을 포기할 생각도 해 보았고 서점에 토지가 꽂혀 있는 것을 보면 심한 혐오감에 빠지기도 했다.
엥? 절대 안돼!!!! 키에에에엑
소설 동의보감에 대해 아십니까?
완결이 나지 않은 비운의 작품...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바람에 드러눕는 풀잎이며 눈 실린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 우짖는 작은 새, 억조창생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이 충만된 이 엄청난 공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일사불란한 법칙 앞에서 나는 비로소 털고 일어섰다. 찰나 같은 내 시간의 소중함을 느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아니 이런 소리 갑자기 죄송한데,
혹시 반드시 그려야만 해라는 '창작도 전에' 창작을 바라는 통증에 시달리는 동인지 작가 여러분들 계신지요.
저는 그때 쯤이면 시간이 너무 아깝고 소중해서 발을 동동거리곤 합니다.
하, 만약 뒤에 쓰인 서문에서 말씀하셨던 수많은 번민으로 인해 글쓰기가 괴로우셔 그만 두셨다 한들,
토지는 이미 그대로도 명작이었을 테지만 저는 한낱 독자로서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을 자신이 없군요.
여전히 만물에 대한 박애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이 일관된 자연과 생명에 대한 애타는 아쉬움과 사랑에 마음이 충만해짐을 느낍니다.
「자서, 1973」
시장바구니를 든 주부가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세상은, 모든 생명, 나뭇잎을 흔들어주는 바람까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들, 진실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고 그것들을 위해 좀 더 일을 했으면 싶었다. 고뇌스러운 희망이었다.
투병으로 인해 힘든 시간 뒤에, 토지 1부를 마무리 하고 쓰인 서문에서 작가님은
이미 글을 쓰는 이유, 자신이 작가인 이유를 뼈에 사무치게 알고 계셨던 것 같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의 원고를 썼던 것이다. 백 매를 쓰고 나서 악착스런 내 자신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어찌하여 빙벽에 걸린 죄인인가. 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징그러운 쌍두아였더란 말인가.
투병으로 인한 것인지는 몰라도, 앞서 감상한 서문들에서 포근한 애정과 애도의 마음이 느껴진 것과 다르게,
이 「자서」에서 나는 더 강렬하고 폭발하는 것 같은 분노와 열망, 생명력을 느꼈다.
난 이 서문은, 1부를 다 읽어본 뒤 다시 한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2부와 어떻게 다른지도, 5부까지 읽은 뒤 또 어떻게 다른지도 또 봐야겠다는 생각이다.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차이가 나서 그런지,
앞서 다른 서문을 읽고 내가 상상했던 것 보다 이 분은 훨씬 강렬한 사람이다.
마지막까지 화가 나 있는 듯한 감정적인 글.
그렇구나... 나는 토지로 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포스트를 쓰면서 생각하는건데, 작가님께서는 이런식으로 누군가 자신의 글을 하나 하나 뜯어가며 멋대로 해석을 덧붙이는 것에 대해 그닥 내키지 않아 하셨으려나 라는 느낌이 좀 든다.
그치만 지 혼자 블로그에 똔 싸느라 힘주는 것 가지곤 뭐라고 안하실거 같음
꼭꼭 씹어서 내 것으로 만들어 가지고 싶은 오타쿠 마음을 이해해주셨으면 한다.
아 짜증나 태어나자마자 토지 읽고 작가님한테 편지보냈어야 했는데
사.랑.한.다.고